귀타비 공업【동쪽의 귀타비】귀타비 거리 이야기 (하) #243
머리말
전편에서는
시즈오카현 이와타시 후쿠데초에서
‘코올텐 귀타비’가 탄생하고,
‘서쪽의 후쿠스케, 동쪽의 귀타비’라 불릴 만큼
큰 성공을 거둔 이야기를 소개했습니다.
이번에는,
창업자 데라다 준페이의 뜻을 이은
2대 준페이가
도쿄에서 브랜드를 어떻게 꽃피웠는지,
그리고 시대의 파도에 휘말리면서도
그 기억을 오타구에 어떻게 남겼는지를
하나하나 풀어가 보겠습니다.
도쿄 진출과 대성공의 그림자
다이쇼 시대, 귀타비 공업은
도쿄 오모리에 대규모 공장을 건설합니다.
당시로서는 드물게
‘마루에 히라(丸に平)’ 로고가 들어간
일루미네이션 간판이 설치되어 있었고,
‘오・니・타・비’라는 문자가
빛나고 있었다는 기록도 남아 있습니다.
밤이 되면,
도카이도 본선을 오가는 기차 창문에서도
그 빛이 선명하게 보였다고 하며,
도쿄의 관문을 알리는 상징처럼
사람들의 기억에 남아 있었습니다.
공장 앞을 지나는 도로는
언젠가부터 ‘귀타비 거리’라 불리게 되었습니다.
2대 준페이는
가맹점에 법랑 간판을 설치하는 등
경영에 힘을 쏟았고,
전성기에는 오사카에도 지점을 두며
약 300명의 직원을 거느리게 됩니다.
당시의 사내 체제
1927년 (쇼와 2년) 무렵
직원 수 264명
그중 공장 근로자 225명
그중 여성 근로자 183명
대부분이 15세 이하의 소녀들이었습니다.
생산량은 계절에 따라 크게 달라졌으며,
봄과 여름은 비교적 한산했지만
겨울철에는 성수기를 맞아
한 사람이 한 달에 5,000켤레를 만들 정도로
분주한 나날이 이어졌습니다.
노동 쟁의
1928년 (쇼와 3년) 2월 13일
처우 개선을 요구하며
약 250명의 규모로
파업이 벌어졌습니다.
공장 축소의 움직임
1934년 (쇼와 9년) 무렵
부지 북쪽 절반을
오모리 고등소학교 부지로 매각하였고,
이듬해 1935년 11월 15일
해당 부지에 오모리 고등소학교가 개교합니다.
이 무렵,
앞서 언급한 일루미네이션 간판도
철거된 것으로 기록되어 있습니다.
귀타비 공업 축소에 대한 자의적 고찰
1937년 (쇼와 12년) 측량 지도에는
공장 북쪽에 ‘오모리 고등소학교’ 표기가 확인됩니다.
귀타비 공업 부지의 북쪽 절반이
매각되었다는 기록과 대조해 보면,
지도상에서 공장 오른편에 위치한
이름 없는 부지도
1934년 또는 그 이전에
매각되었을 가능성이 있습니다.
지도와 사료를 대조해 보면,
귀타비 공업이
무언가의 이유로 부지를 줄여나간 흔적이 보이며,
간판 철거 시기와 맞물려
경영 악화나 외부 요인에 따른
축소 움직임이 있었던 것으로 추정됩니다.
전쟁의 그림자와 사업의 종언
전쟁이 격화되고
일본이 물자 부족에 시달리게 되자,
귀타비 공업은
1940년 (쇼와 15년) 무렵부터
육군 지정 공장으로 전환되어
군용 외투나 군용 양말 등을 생산하게 됩니다.
그리고 1945년 4월 15일,
조난 대공습이 발생합니다。
군수 공장이 밀집해 있던 이 지역은
집중 폭격을 받아
귀타비 공장의 대부분이 파괴되고,
거대한 정문 기둥만이
간신히 남게 되었습니다.
브랜드로서의 ‘귀타비’는
재건되지 못한 채
그 역사의 막을 조용히 내리게 됩니다.
공장 부지의 그 후
공장 부지 약 2,400평 (약 7,920㎡) 전부는
도쿄도에 매각되었고,
1948년 12월 15일
오모리 제8중학교가
이 부지를 매입하여 확장하였습니다.
종전 후의 재건과 종언
1948년 (쇼와 23년)
귀타비 공업에 재직했던
하시모토 아키요시(橋本明吉) 씨가
전쟁 전의 사업을 발전시켜
니혼바시 요코야마초에
귀타비 주식회사를 설립합니다.
제품은 발목 버선에서 양말로 전환되었으며,
이 회사는 쇼와 50년대까지
존속한 것으로 전해집니다.
그 후의 공장 주변
귀타비 공업의 번영으로 인해
‘후지미 거리’라 불리던 도로는
‘귀타비 거리’로 불리게 되었고,
공장이 사라진 뒤에는
‘도호 의대 거리’로 이름이 바뀌어
현재에 이르고 있습니다.
Google 지도에서도
‘귀타비 거리(鬼タビ通り)’라는 표기를
지금도 확인할 수 있습니다.
공장의 흔적은 사라졌지만,
그들이 남긴 숨결은
지금도 이 지역에 뿌리내리고 있습니다.
— 하시모토 씨가 세운 귀타비 고찰 —
전후 혼란기인 1948년,
도쿄 상업의 중심지인 니혼바시에
새로운 회사를 세운다는 것은
상당한 어려움이 따랐을 것으로 보입니다.
그가 구 귀타비 공업의 임원이었고,
과거 니혼바시에 있었던 본점 기능이나
공장 부지 매각 이익 등을
어떤 형태로든 활용할 수 있었던 인물이었다면,
이 재출발은 보다 현실적인 것이었을지도 모릅니다.
시즈오카 후쿠데초 측에 남아 있었을
생산 거점이나 유통망,
그리고 구 회사의 자산 등이
그의 사업 재건을 가능하게 한
핵심 요인이었을 가능성도
충분히 생각해볼 수 있습니다.
이는 어디까지나 상상에 불과하지만,
그의 재건 배경에는
이전의 자산과 인맥이
깊이 작용했을지도 모릅니다.
마을에 남은 기억과 고찰
JR 오모리역에서 가마타 방면으로 이어지는
‘도호 의대 거리’는
지금도 지역 주민들 사이에서
‘귀타비 거리’로 불리고 있으며,
Google 지도에서도 그 흔적을 확인할 수 있습니다.
이번 취재를 통해,
데라다 일족이 이 마을에 남긴 발자취가
거리의 이름을 통해
지역 사람들의 마음속에
깊이 새겨져 있다는 것을
실감할 수 있었습니다.
맺음말
도쿄 진출 이후의 귀타비 이야기는,
정점에 오른 성공을 거두었으나
전쟁이라는 시대의 큰 파도에 휘말려
조용히 막을 내린,
마치 한 편의 영화와도 같았습니다.
한때 정점을 찍은 회사가
오타구에 존재했다는 사실은,
이전에 소개한 ‘신타카 제과’와도
겹쳐 보입니다.
시즈오카와 사가에서 큰 성공을 거두고,
모두 당시 오모리(현재 오모리니시)에
공장을 세운 점도
비슷한 운명을 가진 회사로 느껴집니다.

귀타비 공업이 있던 자리
Otapedia는
데라다 준페이를 ‘오타구의 무명 위인’으로,
귀타비 공업을 ‘오타구의 무명 기업’으로

© 카에루11호(Otapedia) 202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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