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주아트플랫폼에 선보인 자나 카디로바의 참여형 초상화 프로젝트 ‘Performance VI’의 모습. 배문규 기자
제주 원도심의 옛 아카데미극장(제주아트플랫폼)에선 ‘피카소 할망’의 그림을 볼 수 있다. 뽀글머리에 분홍 조끼를 입은 할머니가 해녀 물안경을 썼는데, 하반신이 문어발이다. 그 옆에는 얼굴을 여러 각도에서 그려 입체로 만든 작품도 볼 수 있다. “구십난 할망이 그림 농사 눈도 어둡지만은 2026 강희선”이라는 서명이 눈에 띈다.
전시장 벽이 아니라 극장 의자에 관객처럼 앉아 있는 61점의 작품들은 제주 할망과 삼춘들이 직접 그린 초상화다. 2015년부터 현지 공동체와 함께 초상화를 만들어 빈 객석을 채워온 우크라이나 작가 자나 카디로바의 ‘Performance VI’다. 조선시대 유배지이자 4·3의 상흔을 간직한 제주에는 유배객부터 예멘 난민 신청자에 이르기까지, 바다 밖에서 건너온 이들의 시간이 겹겹이 쌓여 있다. 고국에서 전쟁이 벌어지고 있는 카디로바가 제주 사람들과 만든 얼굴에 개인의 삶과 섬의 기억, 동시대 풍경이 포개진다. 서로 다른 문화가 제주에서 만나 새로운 형상이 되는 올해 제주비엔날레의 화두 ‘변용’의 풍경이다.
제5회 제주비엔날레의 제목은 ‘허끄곡 모닥치곡 이야홍: 변용의 기술’이다. 제주 방언 ‘허끄곡’은 섞고, ‘모닥치곡’은 모으며, ‘이야홍’은 흥을 돋우는 민요의 후렴이다. 전시는 토착문화와 외부 문명이 어울려 새 정체성을 만들어온 과정을 좇는다. 20개국 69팀의 작업이 제주도립미술관, 제주돌문화공원, 원도심에서 제주 고유의 역사와 장소, 자연을 동시대 미술과 알맞게 연결한다.
18일 제주시 제주도립미술관에서 열리고 있는 ‘2026 제5회 제주비엔날레’에 전시된 강요배 작 ‘도새기 통시’. 연합뉴스
제주돌문화공원 오백장군갤러리에 설치된 노진아 ‘진화적 키메라-가이아’. 제주비엔날레 제공
제주도립미술관의 ‘추사의 견지에서: 유배’는 대정에 유배 온 추사 김정희와 그의 ‘세한도’에서 출발한다. 전시는 ‘불계공졸’ ‘귤화위지’ ‘병거사예’ 세 갈래로 이어진다. 강요배의 신작 ‘도새기 통시’에 시선이 한참 머문다. 폭 3m가 넘는 누런 화면에 제주 흑돼지 한 마리가 서 있다. 돌담을 둘러 만든 돼지우리 겸 화장실 ‘돗통’이다. 발효된 거름의 진한 냄새가 화면 밖으로 배어 나오는 듯하다.
서울에서 활동하다 고향으로 돌아온 강요배는 제주의 역사와 시간이 밴 풍경을 그려왔다. 그 곁에는 검은 붓질과 황톳빛으로 섬의 바람과 고독을 그린 변시지의 화면이 걸렸다. 같은 씨앗도 환경에 따라 귤이나 탱자가 된다는 ‘귤화위지’처럼, 예술가들의 작업은 제주라는 풍토와 맞물리며 저마다 다른 미학으로 변모했다.
‘불계공졸’(기교의 능숙함과 서투름을 따지지 않는다)에서는 제주 문자도와 동자석 곁에 관객과 대화하는 노진아의 인공지능 꼭두 조각이 놓였다. 기교를 초월한 경지를 추구한 추사의 미학이 미래 기술 사이로 확장된다. ‘병거사예’(늙고 병든 거사가 예서체로 썼다)에서는 이우환·윤형근·서세옥·이응노의 점과 선, 번지는 색면이 추사의 필묵과 오늘을 잇는다.
제주돌문화공원에서는 화산섬의 자연과 역사가 만난다. 오카베 마사오·미나토 치히로의 ‘타임 링스’는 장소의 기억을 프로타주로 떠내는 작업이다. 태평양전쟁 시기 급조된 홋카이도 옛 마키노우치 비행장 활주로에는 인부들의 발자국이 남아 있다. 어지러운 게다 자국 사이로 맨발 자국 하나가 눈에 띈다. 일제에 강제동원된 조선인 노동자의 흔적이다. 이들이 제주 알뜨르비행장 격납고 표면을 종이 위에 떠내는 작업도 영상으로 만날 수 있다.
원도심에서는 공간 자체가 작품이다. 조선시대 관청 터와 자혜의원·제주대병원을 거친 예술공간 이아, 제주 첫 현대식 호텔을 고친 갤러리레미콘, 극장이던 제주아트플랫폼이다. 장소에는 바깥의 감각이 스며들고, 작품에는 제주의 시간이 밴다. 11월15일까지.
제주 원도심 예술공간 이아에 설치된 김영화의 ‘날과 씨’. 제주비엔날레 제공
제주도립미술관의 ‘추사의 견지에서: 유배’ 전시 전경. 배문규 기자